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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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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庵)이고, 경성판관 한효윤(韓孝胤)의 아들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이 신설되자 정구(鄭毬)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하여 자살한 정여립을 위해 곡을 하며 시신을 정성스레 염한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을 받고 귀양 갔다가 임진왜란 때 석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과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후 한백겸은 호조참의·강원도 안무사 등에 기용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 파주목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사임하고 양주 물이촌(勿移村)으로 퇴거해 있는 동안 역학에 해박하다 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기도 했다. 그는 유몽인(柳夢寅), 이수광(李睟光), 허균(許筠) 등과 함께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614년에 시작하여 다음 해 6월에 그가 완성한 역사지리서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이다. 『동국지리지』는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백겸의 동생은 인조의 장인으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진 한준겸(韓浚謙)이고 아들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한흥일(韓興一)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저서로 『동국지리지』, 『구암집(久菴集)』 등이 있다. 묘는 강천면 부평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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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