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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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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兩試)는 생원시험과 진사시험에서 동시에 합격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써 쌍중(雙中) 또는 구중(俱中)이라고도 했다. 1624년(인조 2) 식년시에서 양시자가 나왔는데 그것도 진사 장인으로 합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수익이다.

조수익의 본관은 순창(淳昌)이고 자는 사정(士靜), 호는 만한(晩閑)이며, 조직(趙直)의 아들이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외손(外孫)이다.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사간원정언이 되었고 1635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에 반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5년 사은겸 주청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 외조부인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간행하였다.

1660년(현종 1) 4월 대사헌으로 있던 조수익이 여주에 있으면서 어머니의 병으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661년 5월 4일 효종이 승하한 지 2년째 되던 날인 대상일(大祥日)에 다시 조수익이 “어미의 병이 매우 위중해 국상(國祥)에 달려오지 못했다”며 파직을 청하고는 덧붙여 전 판중추 조경(趙絅)을 죄주지 말라고 상소하였다. 이 상소가 빌미가 되어 조수익이 1663년 병조참판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사직을 아쉬워한 사관이 몇 자 기록을 남겼다. “삼가 살피건대 조수익은 진신(搢紳 : 높은 벼슬아치)들 사이에 유아(儒雅)한 인물로 일컬어졌으며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여망을 만족시켰다. 그런데 하나의 소를 올려 조경을 구한 일이 있으면서부터 송시열의 패거리가 크게 미워하고 무척 힘을 들여 배척하면서 다시 청로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공의(公議)를 무시한 처사라 하겠다” 하였다. 조수익은 이듬해 한성부우윤으로 재기용되었고 형조·예조참판을 역임한 뒤 1674년 79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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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