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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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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列傳) 창왕 1년(1389) 11월 조에 보면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쫓겨와 있던 우왕을 다시 옹립하려고 모의했던 사람들 중에 우왕의 장인인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이 있는데 이 이림의 사위가 여주에서 살다가 죽은 유염이다.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여헌(汝獻), 호는 묵재(默齋)이며, 문하시중 유혜손(柳惠孫)의 아들이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유염은 천성이 공겸(恭謙)하고 직위가 높을수록 사심을 자제하였으며 부귀에 동요하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일찍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판관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한 뒤 도총제참지가 되었으며 이성계가 주도하는 전제개혁에 반대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들과 등을 지게 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 11월 장인 이림과 함께 김저(金佇)의 옥사에 관련되어 영해(嶺海)로 귀양갔다가 1391년 1월 국대비(國大妃)의 생일을 맞아 풀려났다. 고려가 망하자 새 조정에 출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가솔들을 데리고 행주(幸州)·양주(楊洲)·오봉산(五峰山) 등에서 숨어 살았다. 은거 중에 부모가 돌아가시니 목은과 상의해서 불법(佛法)을 배척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삼년상(三年喪)을 지냈다. 그러다가 1402년(태종 2) 이종덕(李種德), 유관(柳寬)의 끈질긴 권유로 마침내 조선 조정에 나와 전라도 관찰출척사가 되었다. 1417년 판한성부사가 되었고 1420년(세종 2)에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여강백척루하(驪江百尺樓下, 지금의 영월루 마암 아래)에서 낚시하다가 운명했다는 신도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이천에서 여주로 옮겨와 말년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유염의 부음을 들은 세종대왕은 그를 애도하면서 부의와 치제를 하라 명하였다. 이어 깨끗한 관료 생활을 했다고 하여 청백리(淸白吏)로 녹선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산북면 앵자봉(鶯子峰)아래 처음 묘를 썼다가 북내면 봉미산(鳳尾山) 아래로 이장하였으나 영릉(英陵)을 천장해 옴에 따라 지금의 여주시 오학동 오학초등학교 뒤편으로 다시 옮겼다.

□ 참고문헌 : 『고려사』, 『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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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