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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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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퇴부(退夫), 호는 삼휴자(三休子)·석촌(石村)·칠송(七松)이며, 헌납(獻納)을 지낸 경시성(慶時成)의 아들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이 되었고 그해 증광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일본이 20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을 때 명나라가 다시 구원병을 보냈다. 이때 명(明)의 장수 양호(楊鎬)가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로 참전했는데 일본의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이간책에 휘말린 명이 양호를 탄핵하려 하였다. 전후 사정을 간파한 조선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긴급히 명에 파견하였고 이 사절단에 경섬이 서장관으로 동행하였다.

경섬은 그후 지평·장령·헌납을 역임하고 1601년 영광군수로 있다가 남원부사가 되었다. 1606년 성균관사성·홍문관교리를 거친 경섬은 1607년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과 함께 부사로서 임진왜란 후 첫 번째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국교를 다시 열고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포로 1,34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에 우승지·황해감사에 임명되었고 1613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를 거쳐 1616년 충청감사로 부임했다. 1617년 호조참판이 되었고 1619년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묘는 흥천면 대당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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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