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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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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禪宗)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봉림산문(鳳林山門)의 개창(開倉) 조사(祖師)가 여주에서 수도하다가 생을 마친 원감국사 현욱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며 병부시랑 김염균(金廉均)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808년(경애왕 9)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마조(馬祖)의 문인 장경 회휘(章敬懷暉)에게 배워 법을 얻었다. 837년(희강왕 2)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배를 타고 청해진을 거쳐 귀국한 원감은 이듬해 실상사(實相寺)에 들어가 수도하여 민애왕(閔哀王),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840년(문성왕 2)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산 이름을 따서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원감은 경문왕(景文王)의 청으로 고달사에 상주하다가 868년(경문왕 8) 11월 15일 여명에 시자에게 명하여 무상종(無相宗)을 치개하고 세수 82세, 법랍 60하(夏, 스님이 된 뒤로 나이를 셀 때 쓰는 말)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가 죽자 경문왕은 원감화상(圓鑑和尙)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감의 제자 중에는 9살 때 혜목산에서 출가하여 봉림사(鳳林寺)를 세우고 선풍을 드높힌 심희(審希)가 제일이었다. 원감의 문하를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통일신라말기 한창 선종이 세력을 떨칠 때 고달사는 선거(禪居)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대에 이르면 문하에 500여 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게 된다. 원감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조당집(祖堂集)』 권17 혜목산화상 조항에는 “원감화상 현욱은 장경의 제자로 중국에서 귀국하여 혜목산에 띠집을 마련하고 거처하니 혜목산화상이라 하였다. 신라 경문왕은 고달사에 머물기를 명하고 기묘한 향약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라 되어 있고, 봉림사 진경대사(眞鏡大師) 보월능공탑비(報月凌空塔碑)에는 “진경대사 심희가 9세 때 혜목산의 원감에게 출가하여 14세에 대선사의 정법안장선법을 이어 받았다”라 되어 있다. 또한 강원도 양양(襄陽) 선림원지(禪林院址)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에는 “현욱이 혜목산에 머물렀다. 벼랑에 나무를 걸치고 골짜기에 얽어매어 처음 세웠던 것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완성하였다. 선사는 승가의 모범이었고 홍각선사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 라고 쓰여 있다.

□ 참고문헌 : 『조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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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