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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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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의 계비(繼妃)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이고 어머니는 원명직(元命稷)의 딸이다. 1745년(영조 21) 11월 여주읍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18년 동안 왕비 자리에 있으면서 “왕비의 성교(聲敎)는 방달(房闥 : 규방의 문지방)을 벗어나 나가서는 아니 되고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라며 관인(寬仁)과 공검(恭儉)으로 늙은 임금을 보좌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동조했다 하여 정조(正祖)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이 정조의 대리청정을 놓고 갈등관계에 있을 때 정조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보호했던 까닭에 정조는 늘 눈물을 흘리며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 사후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했다. 이 기간 동안에 벽파(僻派)인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정치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시파(時派)의 신서파(信西派)를 압박하여 천주교에 대한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가환(李家煥)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丁若鍾) 등 간부들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 갔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恩彦君)과 그 부인 및 며느리 등도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이런 과단성 있는 정치수행은 흐트러진 질서를 다시 찾고 국가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4년간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순조가 15세가 되던 1804년(순조 4) 수렴을 거두고 편전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소생 없이 죽었다. 능은 구리시 동구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 참고문헌 : 『英祖實錄』, 『元陵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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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