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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 전경
숙종(肅宗)의 계비(繼妃)로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67년(현종 8) 4월 한양 반송방(盤松坊)에서 태어났다. 해와 달이 양쪽 어깨에서 나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노는 것이 예사 아이들과 아주 달랐고, 남과 더불어 겨루거나 다투지 않았으며, 남의 과실을 들어 말하지 않았다. 누가 남의 시비를 논하는 일이 있어도 문득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6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는데 애통하고 슬퍼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고 한다. 숙종도 “일찍이 한 번도 왕후가 과오를 저지르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한 한 번도 말을 거칠게 하거나 낯색이 급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술회하였다.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한때 왕의 총애를 잃었다. 장희빈(張禧嬪)이 왕자 균(呁, 경종)을 낳자 1689년(숙종 15) 숙종은 균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에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들이 소를 올려 극렬히 반대하자 숙종은 노론을 면직 또는 사사시키고 남인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궁을 나와 안국동 본댁(本宅, 감고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뒤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 금(昑, 영조)을 얻게 되었고 이는 왕비가 된 장씨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때를 노려 서인의 소론이 폐비복위운동을 전개했다. 남인 측에서는 폐비복위운동을 주동한 소론을 강력하게 탄핵하여 많은 사람을 하옥시켰다. 그러나 숙종은 오히려 남인의 처사가 지나쳤다며 남인을 대거 숙청하고 노론을 등용하는 갑술옥사(甲戌獄事)를 일으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궁궐로 돌아온 인현왕후는 다시 빈으로 강등된 장씨와 화합을 도모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숙종 27) 8월 창경궁 경춘전에서 소생 없이 35세를 일기로 죽었다. 능은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 참고문헌 : 『明陵誌』『肅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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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