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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효자 정각 중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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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효자(吉孝子) 정각(旌閣) 중건기(重建記)1)

지난 옛날 현종(顯宗) 때 포상하는 은전(恩典)이 시골 향리에까지 파급되었으니 이는 효자(孝子)이신 해평인(海平人) 길수익(吉壽翼) 가문(家門)의 일이다. 효자(孝子)는 대대로 여주 왕대리에서 사셨으며 만력(萬曆) 경술(광해군 2, 1610) 여름에 부친 옥(沃)을 모시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제비 여울에서 고기잡이2)를 하다가 날이 저물어 모두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삿갓바위 아래에 이르러 배가 침몰하니 효자는 평소 수영을 잘하여 헤엄을 쳐 언덕에 올라서 보니 그의 부친이 깊은 물속에서3)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라 효자는 또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어 부친을 끌어안고 나오려 애를 썼으나 끝내 기진맥진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물에 빠져 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가까스로 시신을 건져보니 부자가 서로 꼭 끌어안은 채로 숨진지라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두 시신을 떼어 내서 장례를 모시니 그때 효자의 나이 29세의 젊음이더라.

그의 아내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남편이 아버지와 같이 한꺼번에 운명한 것을 슬프고 원통하게 여기며 우선 시아버지 상복(喪服)을 3년 동안 입고, 다시 남편 상복을 3년 동안 입으시니 전후(前後) 6년이란 세월이 흘렀더라. 복을 마친 뒤에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니 시어머니께서는 다른 아들의 집에 가서 사시지 않고 그 며느리에게서 천수(天壽)를 다 하셨다. 아들 3형제를 기르시니 장자(長子)는 응인(應仁)이고 차자(次子)는 응기(應麒)이니 그는 유복자(遺腹子)이다. 그들이 장성하여 아버지에 대한 상복을 추후 3년 동안 입었다. 그로부터 61년 뒤(현종 11년, 1670)에 여주 고을 사또께서 이 사실을 나라에 상소하였던바 조정에서는 효자(孝子) 정려(旌閭)를 내리셨다. 그때 박씨(朴氏)의 나이가 90세가 되었더라. 그에게도 효부(孝婦) 정렬(貞烈)의 표창이 있었으니 이런 가상한 일이 어느 곳에 또 있으리오!

외재(畏齋) 이문충공(李文忠公)4)이 특히 전언하되 효자의 선대(先代)에 휘(諱) 분(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셨다. 그의 부친 사첨(士瞻)께서 원향령(原鄕令)으로 계실 때 부하의 무고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겨우 15세의 어린 몸으로 법정에 들어가서 부친의 죄를 대신하여 죽겠노라하고 애원하여 무죄 방명된 사실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되어 전한다고 한다. 그로부터 7대(代) 만에 야은(冶隱) 선생 휘(諱) 재(再)5)께서 출생하셨으니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라는 직위에 오르셨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학문을 익혀 도학(道學)6)의 후계자가 되셨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라 하셨다.

아! 슬프도다. 효자께서는 죽음으로써 부친을 구원하려고 무섭게 깊은 강물에 뛰어들어 부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돌아가셨으며, 또한 효부(孝婦) 정렬(貞烈)의 아내를 두셨으니 영지(靈芝)의 뿌리가 어찌 없다 할 것이며 예천(醴泉)의 근원이 어찌 없다 하리오! 실로 감격할 일이로다. 효자의 후손이 무후(無后)하고 정려각(旌閭閣)이 피폐되어 다시 징명(徵明)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진 사람의 훗일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천리(天理)의 무심(無心)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그의 방손(傍孫)되는 민식이 과감한 심성으로 이금계, 강경산 두선생의 학행(學行)을 이어 받아 좋은 일 하는데 서슴지 않는 의기(義氣)로 정문(旌門)의 내력이 민몰(泯沒)되어감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문제족(一門諸族)과 더불어 상의하고 재전(財錢)을 추렴하여 정문(旌門)을 중건(重建)하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삼강오륜의 예의범절이 문란하여 부자와 군신간의 도리를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나라에서 표창하신 증명을 어디에서 다시 보게 되리오. 원하건데 정문(旌門)의 내력을 한마디 말로 기록하여 후세에 권선(勸善)할 수 있는 거울이 되게 하여 주시오” 하거늘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이러한 효자야 말로 인륜이 땅에 떨어진 이때에, 다시 부모에게 효도하는 미행(美行)이 열릴 수 있으며, 나라에서 표창한 덕정(德政)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니 참으로 옳은 일이로다.

이렇게 함으로써 후세에 불충(不忠) 불효(不孝)하는 무리들이 효자(孝子) 정려각(旌閭閣)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또한 감동될 가능성도 있으리니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어찌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간략하게 복원(復元)하여 기록하노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6 임신(六 壬申) 서기(西紀) 1932년(年) 2월(月) 하완(下浣) 동양(東陽) 신현국(申鉉國)7) 호(號) 직당(直堂)

1988년 1월 18일
국역(國譯) 감수(監修) 삼은(杉檼) 박용기(朴容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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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