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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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6년(정조 즉위년):여주 등지의 윤음을 위조한 죄인을 국문함
- 내용 : 윤음(綸音)을 위조(僞造)한 죄인을 국문하였다. 전 장령 이평(李枰)이 상소하기를, “신의 이웃에 있는 사람이 충주(忠州)·여주(驪州)에서 와서 신에게 묻기를, ‘일곱 조항의 윤음이 6, 7행(行)에 불과한데 두 고을 사이에 전하고 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하기에, 신이 상세히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원래 조지(朝紙)에 게제된 사륜(絲綸)이 아니었으며 한(漢)·당(唐)나라 중주(中主) 이하의 임금도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 윤음에 이르기를, “근래 윤음을 위조한 자가 있어 이를 향곡(鄕曲)에 전파시키고 있는데 동쪽으로 여주(驪州)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주(原州)·횡성(橫城)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서(嶺西)로 넘어가 관하(關河)에 이르게 되면 기전(畿甸)과 양호(兩湖)도 따라서 소동이 일어나게 될 것은 미루어 알 수가 있다.”
- 출전 : 『正祖實錄』 권2, 정조 즉위년 12월 25일 임술.
- 1778년(정조 2):경기·호서·영남·관동 4도의 진휼을 마침
- 내용 : 경기(京畿)·호서(湖西)·영남(嶺南)·관동(關東) 4도(道)의 진제(賑濟)를 정월부터 시작하여 설시(設施)하다가 이에 이르러 진휼(賑恤)을 마쳤다【경기의 광주(廣州)·수원(水原)·여주(驪州)·남양(南陽)·죽산(竹山)·이천(利川)·음죽(陰竹) 등의 고을과 화량진(花梁鎭)은 기민(饑民)의 총수가 6만 4천 24구(口)이고 진곡(賑穀)이 4천 2백 25석이었고, ……】.
- 출전 : 『正祖實錄』 권5, 정조 2년 5월 5일 갑자.
- 1779년(정조 3):경기·관동·영남·관북·호서에 진구를 마침
- 내용 : 경기(京畿)·관동(關東)·영남(嶺南)·관북(關北)·관서(關西)·호서(湖西)에 진구(賑救)를 설행하였는데, 정월부터 진구를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구를 끝마쳤다【경기는 여주(驪州)·이천(利川)·죽산(竹山)·안성(安城)·음죽(陰竹) 등 고을의 기민(饑民)의 총수가 3만 9천 3백 64구(口)이고, 진곡(賑穀)은 3천 1백 6석(石)이다】.
- 출전 : 『正祖實錄』 권7, 정조 3년 5월 29일 임자.
- 1779년(정조 3):여주목사 박사륜 등이 거행에 민폐를 끼침
- 내용 : 김면주가 말하기를, “양주목사(楊州牧使) 엄숙(嚴璹)·여주목사(驪州牧使) 박사륜(朴師崙)·양근현감(楊根縣監) 김재화(金載華)·과천현감 이의화(李義和)는 모든 거행에 민폐를 끼치는 것이 많고, 음죽현감(陰竹縣監) 이보첨(李普瞻)은 잘 다스리는 것이 한 도(道)에서 으뜸입니다.”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8, 정조 3년 8월 4일 을묘.
- 1779년(정조 3):영릉에 전배하고 능 주위를 살핌
- 내용 :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에 전알(展謁)하였다. 여주(驪州)에 머물러 먼저 녕릉(寧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의식대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8, 정조 3년 8월 5일 병진.
- 1779년(정조 3):김양행을 만나고, 송시열의 사당 짓기를 청하는 유생 정운기의 청을 윤허함
- 내용 : 임금이 여주행궁(驪州行宮)에 나아가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좌의정(左議政) 서명선(徐命善)·행부사직(行副司直) 김양행(金亮行)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임금이 또 말하기를, “선조(先朝) 경술년 행행(行幸) 때에 고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를 숙소로 삼기를 우러러 청하였는데, 대개 하루 안에 두 능(陵)에 전배(展拜)하고 이천(利川)으로 돌아가자면 1백여 리를 왕래하느라 반드시 밤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에는 미처 수리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신하들이 또한 많았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고, 숙묘(肅廟) 무진년에도 이천을 숙소로 삼았으므로 계명(鷄鳴)이 지나서야 행궁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에는 이런 폐단을 염려하여 여주에서 밤을 지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8, 정조 3년 8월 6일 정사.
- 1779년(정조 3):서명응에게 행차의 배종록을 짓고, 남한산성에 대한 서적을 만들라고 명함
- 내용 : 하교하기를, “전에는 온천(溫泉)·풍덕(豊德)·여주(驪州) 등 먼 길에 동가(動駕)하면 회란(回鑾)한 뒤에 모두 배종록(陪從錄) 책자가 있어 배종한 뭇 신하로부터 장사(將士)에 이르기까지 성명(姓名)과 총수(摠數) 및 연로(輦路)의 사실을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상세히 갖추어 기재하여 뒷사람을 징계하는 방도로 삼았다. 어제 산성(山城)에서 대략 거론하여 하교하였거니와, 이것은 우러러 계술(繼述)하는 한 방도이니, 이번 행차의 배종록을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치라.”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8, 정조 3년 8월 11일 임술.
- 1779년(정조 3):형조참판 김양행의 졸기
- 내용 : 형조참판 김양행(金亮行)이 졸(卒)하였다. 김양행의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지암(止庵)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하였으며 고(故) 대사헌(大司憲) 민우수(閔遇洙)에게 수업하였다. …… 기해년에 임금이 녕릉(寧陵)에 전알(展謁)하였을 때에 김양행이 여주(驪州)에 살았으므로 명을 받고 행전(行殿)에 들어와 뵙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따라서 조정에 나왔다가 곧 돌아갔다.
- 출전 : 『正祖實錄』 권8, 정조 3년 11월 23일 계묘.
- 1780년(정조 4):지평 허담이 강릉부사 정상인을 여주에서의 죄상을 논함
- 내용 : 지평(持平) 허담(許霮)이 상서하기를, “…… 강릉부사(江陵府使) 정상인(鄭象仁)이 판재(板材)를 베어 몰래 강민(江民)에 팔고 여주부(驪州府)에 이르러 그 잡아낸 40여 판(板)을 청심루(淸心樓) 아래에서 불사른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낭자하게 탐욕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정상인을 엄히 살펴서 무겁게 감죄(勘罪)하소서.”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9, 정조 4년 1월 3일 임오.
- 1785년(정조 9):여주의 대로사에 사약한 일을 연신에게 이야기 함
- 내용 :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일전에 여주(驪州)의 대로사(大老祠)에 사액(賜額)하였다. 연전의 능행(陵幸) 때에 청심루(淸心樓) 위에서 선정(先正)의 시(詩)를 보고 비록 ‘달이 잠기도록 앉아 있으니 능(陵)의 잣나무는 컴컴한데, 어디에 꿇어앉아 아뢸지 알 수 없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か陳辭]’라고 한 이 한 구절로써 말하더라도 선정의 마음을 상상(想像)할 수 있었으므로 불현듯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20, 정조 9년 9월 20일 병인.
- 1786년(정조 10):영릉의 역사가 끝나 해당 관리들에게 포상함
- 내용 : 영릉(英陵)에 보토(補土)의 역사가 끝났다고 보고하였다. 감동관 예조판서 이문원(李文源), 지방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중복(李重馥)에게 모두 품계를 올려 주고, 능관(陵官)과 감역(監役) 이하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 출전 : 『正祖實錄』 권21, 정조 10년 3월 3일 정미.
- 1786년(정조 10):이문원을 여주목사로 보임함
- 내용 : 이문원(李文源)을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보임하였다. 이문원에게 누차 유시하였으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명을 내린 것이다.
- 출전 : 『正祖實錄』 권22, 정조 10년 7월 27일 무진.
- 1787년(정조 11):여주의 예에 따라 고양군에서 유생·무사를 시취함
- 내용 : 고양군(高陽郡)에서 유생(儒生)·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주가(駐駕)하는 곳에는 반드시 은택이 있거니와, 행행(行幸)이라는 말도 이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풍덕(豊德)의 제릉(齊陵)·후릉(厚陵)과 여주(驪州)의 영릉(英陵)·녕릉(寧陵)과 파주(坡州)의 영릉(永陵)에 전알(展謁)하는 행차 때에 그 지방에서 밤을 지내기 때문에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여 선비를 뽑거나 무기(武技)를 단시(單試)한 전례가 있거니와, 또 능침(陵寢)을 받든 지방은 사체(事體)가 절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행행은 또 이틀 동안 이어서 그 고을에서 밤을 지내야 하므로 작은 지방에 공억(供億)하는 괴로움을 치우치게 받는데도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일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곧 양주(楊州)의 유생·무사도 마찬가지로 부시(赴試)하라고 명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24, 정조 11년 8월 10일 을사.
- 1790년(정조 14):여주 등지에 거둥시 민폐를 줄이도록 하교함
- 내용 : 하교하였다. “풍덕(豊德)에 있는 제릉(齊陵)과 후릉(厚陵), 여주(驪州)에 있는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에 행행(幸行)할 때와 온천에 행행할 때,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서 으레 아침저녁의 찬공(饌供)과 주물상 등을 준비하고 있는데 선조(先朝)께서 여주에 행행하였을 때와 경오년에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로부터 모두 없애도록 명하고, 서울에서 적당히 날라다가 거행하였었다. 더구나 본원(本園)에 거둥할 때에는 매사에 폐단을 모두 줄이려고 하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 출전 : 『正祖實錄』 권29, 정조 14년 1월 4일 을유.
- 1790년(정조 14):수어사 정창순이 여주에서 3일간 단이슬이 내린 것을 보고함
- 내용 : 이문원에서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수어사(守禦使) 정창순(鄭昌順)이 상에게 고하기를, “신이 재신 민종현(閔鍾顯)에게 들으니, 6월 임자일에 여주(驪州)에서 3일 간 단이슬이 내렸는데 그의 종제인 민이현(閔彛顯)이 민종현에게 편지로 알려왔다고 합니다.”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31, 정조 14년 8월 14일 임술.
- 1794년(정조 18):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 사관에게 별도로 내린 유시
- 내용 : 경기 각읍의 암행 어사와 적간사관(摘奸史官)에게 별도로 유시하기를【광주(廣州)·죽산(竹山)·양성(陽城)의 어사는 박윤수(朴崙壽)이고, 고양(高陽)·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豊德)의 어사는 홍낙유(洪樂游)이고, 이천(利川)·여주(驪州)·음죽(陰竹)의 어사는 정내백(鄭來百)이다.】 …….
- 출전 : 『正祖實錄』 권41, 정조 18년 11월 16일 경자.
- 1796년(정조 20):공명 승첩으로 표훈사와 신륵사의 중수를 원조함
- 내용 : 공명승첩(空名僧帖) 250장으로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와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를 중수(重修)하는 일에 원조해 주었다. 예조판서 민종현의 아룀에 인한 것이었다.
- 출전 : 『正祖實錄』 권45, 정조 20년 8월 25일 정유.
- 1797년(정조 21):대사헌 이병정을 여주목사로 보임함
- 내용 : 대사헌 이병정(李秉鼎)을 특별히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보임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47, 정조 21년, 9월 27일 계사.
- 1799년(정조 23):유선 이성보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가을까지 쉬도록 허락함
- 내용 : 유선(諭善) 이성보(李城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 요즘 들으니, 28일과 3일에 내린 비가 여주(驪州) 근처는 골고루 적시지 못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한강 이북에는 한강 이남보다 조금 낫게 비가 내렸으나 그래도 비를 바라는 한결같은 마음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날이 새도록 은하수만 바라보고 보내는 날도 있다. ……”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51, 정조 23년 5월 7일 갑자.
- 1800년(정조 24):지평 신귀조의 청에 따라 천주교의 전파를 방치한 양근군수 정동간을 심문함
- 내용 : 지평 신귀조(申龜朝)가 또 아뢰기를, “요즘 사학(邪學)이 삼남(三南)에서 기승을 부리다가 기호(畿湖) 지방으로 차츰 파급되고 있습니다. 여주(驪州)와 양근(楊根)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여주 옥안에 구금된 자가 10여 인에 이른다 하고, 양근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것을 배우지 않은 마을이 없어 장차 온 경내가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갈 판국이 되었는데도 그곳의 수령은 전혀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삼남의 감사에게 엄중 지시하여 각별히 단속하게 하고 양근 군수 정동간(鄭東幹)은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죄를 물어 엄중히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 출전 : 『正祖實錄』 권54, 정조 24년 4월 29일 신사.
- 정조대왕 행장(行狀) 중의 여주 기사
- 내용 :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사당에 사액(賜額) 해줄 것을 청하니,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하고 어제(御製)에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다 세웠다. 대가가 이천(利川)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 출전 : 『正祖實錄』 권54, 부록 정조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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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