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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94년(태조 3):여흥군(驪興郡)에 우박이 내림
    • 내용 : 여흥군(驪興郡)에 우박이 내렸다.
    • 출전 : 『太祖實錄』 卷5, 太祖 3년 4월 28일 정유.
  • 1396년(태조 5):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졸기
    • 내용 :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의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사람 정동행중서성 낭중 도첨의찬성사(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이곡(李穀)이 원조(元朝)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에 가서 갑오년(1354)에 회시대책(會試對策)에서 1등, 전시(殿試)와 정시(庭試)에서 2등 갑(甲) 제2명으로 뽑혔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彛)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 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정랑(典理正郞)·예문응교 겸 춘추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두 번이나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의 입구(入寇)로 경성(京城)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왕의 행행(行幸)에 호종,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勅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우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대사(指空大師)와 나옹대사(懶翁大師)의 탑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 출전 : 『太祖實錄』 권9, 태조 5년 5월 7일 계해.
  • 1396년(태조 5):한성윤(漢城尹) 민개(閔開)의 졸기
    • 내용 : 한성윤(漢城尹) 민개(閔開)가 졸(卒)하였다. 개(開)는 본관이 여흥(驪興)이요, 전리판서(典里判書) 민변(閔忭)의 막내아들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뜻이 강개(慷慨)하여 대간(臺諫)을 지냈고, 지신사(知申事)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말의’ 출납을 잘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위에서 물러나던 날에 민개가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반대하고자 하여 말과 기색[辭色]에 나타냈었다. 남은(南誾) 등이 조준(趙浚)에게, “개는 베어야 한다.” 하였으나, 준이 반대해서 죽지 않았다. 뒤에 경상·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모두 성적이 좋았었다. 죽을 때의 나이가 37세였다.
    • 출전 : 『太祖實錄』 권10, 태조 5년 12월 3일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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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