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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서원 춘향제
기천서원은 본래 여주목사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발의로 1580년(선조 13) 여주읍 마암(馬巖) 서편에 마암서원(馬巖書院)이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됨에 따라, 1611년(광해군 3) 자리를 옮겨 현재의 이포지역에 복원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출발하였는데, 1611년 복원과정에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 1515~1554)를 추향(追享)하였다. 이어서 1625년(인조 3)에는 ‘기천(沂川)’이라 사액되어 여주지역의 대표적 강학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추향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661년(현종 2)에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1625)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耉, 1596~1637)를 추향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을, 다시 순조대에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1607~1667)를 추가함으로써 총 8명의 선현을 제향하면서 명실공이 여주지역의 대표적 서원으로 자리잡았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른 훼철 이후 기천서원의 재건 노력은 1937년 전 홍천군수 김영진(金泳鎭)이 1936년 병자홍수 때 오대산 등지로부터 떠내려 온 목재의 일부를 얻고 남양 홍씨 문중에서 기천서원 유지 460여 평을 확보하여 일단 사우 건물만을 건립하여 ‘모현사(慕賢祠)’로 중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여주군수 김기영의 지원으로 향교재산 중 일부를 분할 받고, 모재 후손들의 성금으로 향전(享田) 2,300여 평을 확보하였다.
1978년에는 도유사 민진달(閔達鎭)이 여주군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1979년에 사우를 재건축하고, 서예가 김충현(金忠顯)의 필적으로 기천서원이라는 편액을 다시 달았다. 이후 복원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1985년에 국비 지원을 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93년에는 기천서원유회(沂川書院儒會)를 조직하였으며, 항구적인 재원 마련을 위해 8현의 후손들로 기후회(沂後會)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포시장에는 기천유회관(沂川儒會館)도 건립하였다. 기천서원의 제향일은 본래 2월과 8월 중정일이었으나, 2002년부터 춘향제만을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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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