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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사 강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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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가 쓴 강한사 편액
대로사는 조선 중기의 대유(大儒)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여주시 하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송시열을 제향하는 사당이 여주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효종의 능침인 녕릉(寧陵)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송시열은 효종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정의 대권인 세도(世道)를 자임할 수 있었는데,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북벌정책은 중지되고 그 자신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1682년(숙종 8) 송시열은 수원(水原)에 있다가 영부사(領府事)로 숙종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도중에 한강 강교에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발길을 여주(驪州) 녕릉으로 돌렸다.1) 그리고 이광하(李光夏, 1643~1701)의 집을 빌려 우거(寓居)하면서 효종 능이 바라보이는 곳에 가서 밤늦도록 맨바닥에 앉아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기도 하고, 청심루에 올라 효종과의 우의를 회상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2) 이렇듯 군신간의 우의를 회고하면서 북벌의 대의를 주장하던 송시열은 이듬해 5월 서원(청주)으로 돌아갔다.
송시열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사후 하나의 사표로 회자되어 노론계의 인사들에 의해 그를 제향하는 곳이 없을 수 없다는 의론이 일어나서, 1731년(영조 7)에 정호·민진원·이재 등에 의해 주치(州治)의 남록에 영당(影堂)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영당은 서원·사우의 남설로 인한 극심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 1741년(영조 17)에 내려진 신설 금지 및 신축 서원·사우의 훼철령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여주에서 송시열의 사우 건립이 다시 추진된 것은 국왕 정조의 배려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조는 1779년(정조 3) 영릉(英陵)과 녕릉(寧陵)을 전알(展謁)하기 위해 여주로 행차하게 되는데 참배를 마친 후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의 고사를 거론하여3) 사우의 건립을 사실상 지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 만큼 건립에서부터 사액에 이르는 과정도 서원신설 금지령이 일반적이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사우의 건립은 정조의 행차가 있었던 1779년 당해에 시작되어 6년 뒤인 1785년(정조 9)에 준공을 보았고, 곧바로 사액(賜額)이 이루어졌다.4) 사우의 명칭은 대로사로 하였는데 그 뜻은 ‘덕망이 높은 노인’이라는 의미이지만, ‘천하대로(天下大老)’라는 용례와 연결해서는 사림의 최고 종장에게 붙여주는 존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1873년(고종 10년)에 전국의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 서원·사우는 모두 훼철하였을 때, 대로사는 훼철할 수 없었기에 이름만이라도 강한사(江漢祠)로 바꾼 것에서 그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정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1787년(정조 11)에는 친히 비문을 찬서(撰書)하여 어제어필(御製御筆)의 묘정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광복 이후 대로사의 재건은 1978년 10월 대로사유회(大老祠儒會)가 새로이 발족하면서 정관을 제정하고 전국 유림을 상대로 조직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에는 일제강점기 및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실상 마비된 춘추 제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대로사 본전 및 묘정비각, 내외삼문 등의 보수 정화사업을 진행하였다.
특히, 1985년부터는 숙원사업의 하나로 유회의 사무는 물론 송시열의 춘추대의를 선양하기 위한 강학의 공간으로 추양재(秋陽齋)의 건립을 국회에 직접 청원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여 1993년 추양재의 중건을 이루어냄으로써 재건사업을 일단락 지었다. 이러한 일련의 복원사업 과정에서는 부원장·원장으로 활동한 김동현(金東鉉(鍾秀))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대로사의 제향일은 2월 및 8월 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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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