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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초등학교 신륵사 봄소풍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런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38°선을 경계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교육도 군정하의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교육은 이제까지의 전체주의적인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 교육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틀을 짜게 되었다.
미군정의 학무 당국은 1945년 9월 17일 일반 명령 제94호를 통해 9월 24일 공립 초등학교가 수업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고, 사립 초등학교는 개교 전에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또 9월 28일에는 각 도에 보낸 통첩에서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서도 수업을 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12월 19일에 유억겸이 학무국장에 임명되고 1946년 3월 29일에는 군정 법령 제 64호로 학무국이 문교부로 승격되었다.
이 기간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교육의 진정한 태동기였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23일에 교육심의회를 조직하였고 여기서 새로운 교육제도를 제정하였다. 종래의 이원제 대신 일원제를 채택하고, 수업 연한은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6년(고등중학교의 전기 3년을 중등과, 후기 3년을 고등과라 함), 실업고등학교 6년, 사범학교 3년, 대학 4년, 의과대학 6년으로 하고, 의대를 제외한 일반 대학에 1년 이상의 대학원 과정을 두었다. 그리고 3학기제를 폐지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1학기를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2학기를 3월부터 8월까지로 정해 1946년 3월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안호상이 취임하여 민주주의 민족 교육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반공정신을 확립하기 위한 사상 보급에도 중점을 두었다. 1949년 11월 30일 교육법이 통과되고 12월 31일 법률 제86호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교육 목적을 정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차차 자리를 잡아가던 교육이 1949년 공포된 교육법에 의하여 문교부에서는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여주에도 여주군 교육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어 우리 민족은 일제 통치 이후 또 다시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사회의 각 분야는 피폐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교육이전에 생존이 문제되는 시기였던 만큼 우리 교육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피난의 물결에 휩쓸려 고향을 등지게 되고 교육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우리 민족은 전쟁 중에서도 천막 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교육열로 2세 교육에 힘을 쏟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였다. 여주교육청은 1953년 1월 1일 이기호 씨가 초대 교육감으로 취임하여 여주 교육의 질서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후로 제2대 이관하 교육감, 제3대 이귀섭 교육감, 제4대 송창섭 교육감이 역임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며 사회가 차차 안정기로 접어들자 정부 당국은 파괴된 학교 건물을 복구하고 학교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교육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의무교육 및 문맹자 퇴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 4월 20일 ‘교육과정 시간 배당령’을 공포하고 1955년 8월 1일 문교부령 44호로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공포하여 국민학교 교육의 골격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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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