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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이후의 정당과 정치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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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취임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는 진전되었으나, 정당의 분화가 인물과 지역적 연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이념과 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정당의 정체성은 날이 갈수록 희석화되었다. 이른바 ‘3김 정치’와 지역분할 구도를 혁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냉혹한 현실정치의 격류에 밀려 표류하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단기적 정치조망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당을 손쉽게 바꾸는 ‘철새 정치인’의 숫자가 늘어갔다.

1995년 3월 김종필은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뒤이어 실시된 1995년 6월 지방자치선거에서 민자당은 참패한다. 이 선거에서 지역주의는 적나라한 모습으로 재연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및 김종필 3김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1995년 7월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한 뒤 민주당을 탈당하고, 9월 5일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이로써 ‘3김 시대’는 다시 시작했다. 왜소화된 민주당은 일부 개혁세력들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으나 약세를 면치 못했다. 1995년 12월 집권여당인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심기일전을 꾀한다. 이후 신한국당은 1997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이인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직에 입후보하였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정치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자민련과 이른바 ‘공동정부’를 구성하였으나, 의회에서의 ‘여소야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신당을 흡수하는 등 과감한 정계개편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한국정당정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지역정당의 틀을 탈피하여 전국적 기반의 가진 정책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1996년 선거는 1996년 2월 7일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 창당함으로써 신한국당의 정동성, 민주당의 이규택을 비롯하여, 1995년 9월 11일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합당한 새정치국민회의의 민호영, 1995년 4월 3일 창당된 자유민주연합의 허정남이 출마하여 여주지역의 각 정당을 대표하게 되었다.

2000년 4월 13일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1997년 10월 2일 신한국당에서 당명을 변경한 한나라당의 이규택, 2000년 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가 당명을 변경한 새천년민주당에서 조성우가 출마하였으며, 자민련의 허정남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여주지역의 정당활동을 하였다.

오는 2004년 4월 15일 실시되는 제17대 총선거에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그리고 2003년 11월 17일 창당된 열린우리당 등이 소속 지구당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할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여주는 2004년 3월 국회에서 획정된 선거구 획정위원의 선거구의 인구 상하한선은 10만 5천 명에서부터 31만 5천 명으로 조정, 여주와 이천이 동일한 선거구가 되었다. 불과 인구 1천여명이 부족하여 여주선거구가 이천과 통합됨으로써 경기지역에서 유일하게 독립된 선거구가 없어지게 되어 중앙정치권에서 여주지역의 정치 이익이 대변되는 기회가 약화되어 여주지역 발전에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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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