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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고려시대 원주 지내촌(原州 地內村, 지금의 북내면 가정리)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가정(稼亭)이다. 언뜻 볼 때는 넓은 들 가운데 기름진 옥토를 많이 가진 시골 지주가 농막을 짓고 권농하는 뜻에서 지은 정자의 이름인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려 충숙왕이 다시 복위한 무인년(戊寅年, 1338년)의 이야기인데, 석양이 질 무렵 멀리 봉이고개(지금의 신륵사와 소지개 사이의 고개)에서 괴나리봇짐을 진 초라한 옷차림의 40대 장년이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는 재를 넘어 신발을 벗고, 경기와 북원(지금의 원주) 경계에선 버선을 벗고 맨발로 금당개울을 건너 지내면(地內面)으로 들어섰다.
금당개울을 건너서 가만히 산을 둘러보니 산세가 유하고 높은 봉은 그윽해 보이니, 촌락에 멋이 있고 또 머물 만한 곳인 듯하다. 한 골짜기를 찾아드니 어둡기 시작하는데 집들은 과히 크지 않으나 그런대로 먹고사는 집같이 보이는 곳이 두 집 뿐이다. 한 집에 가서 유하기를 청하니 한마디로 거절당하였다. 다음 집 문밖에 가서 사람을 찾으니 노파 하나가 나왔다. 하룻밤만 유하기를 청하니 선뜻 대답을 한다. 그러면서, “저 아래 집이 있는데 어째서 예까지 올라오셨소! 아 아 그 집에서는 유하는 것을 꺼리지요. 혹시 처녀를 동원하러 온 사람은 아니겠지?” 하면서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 그 집에서는 어째 사람을 재우지 않소?”
“그 집에 과년한 처녀가 있는데 혹시 원나라에 붙잡혀 갈까 두려워 그러죠. 더구나 무남독녀라서 더욱 겁을 내지요.”한다. 이런 산간 촌락에까지 동녀(童女) 차출이 있으니 참으로 근심스러운 일라고 생각하였다. 이튿날 보개산(지금의 보금산)에 올라가 여흥의 강변과 들판을 감상하고 내려다보니 어제 저녁에 쉬던 외딴집 근처가 산세로 보아서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는 바로 정자를 짓고 정자 이름을 가정(稼亭)이라고 했다. 동네사람들은 그 정자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초라한 모습으로 보아 가난한 사람 같기도 하고 늘 조용히 정자에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 같기도 했다.
어느 해 7월, 삼복더위가 극심했다. 바람 한 점 없어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날씨에 뜨거운 햇빛만 내려쬐는 한낮이었다. 농부들도 더워서 들에 나가지 못하고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잠시 후에 보개산과 봉미산 너머로 검은 구름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천둥과 번개가 연이어 일어나며 폭우가 쏟아졌다. 무서운 폭우에 금당천 물이 갑자기 불어났다.
비가 그치고 나서 여흥 쪽을 건너다보니 일대의 사령들이 내려와 벽절나루를 건너 금당천을 건너려다 갑자기 불어난 홍수에 건너지 못하고 북원땅[池內村]을 건너다 보고만 있었다.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기는 하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손짓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죄인을 잡으러 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때 정자를 지키던 사람은 금당천에 낚시를 나갔다. 이상하게도 금당천 한복판에서 강원도 쪽(지금의 가정리 반여울쪽)은 물이 얕아 여울이 져 낚시질하기에 좋고 여흥 쪽으로는 홍수 때문에 물이 범람하여 감히 건너기는커녕 구경하기도 무서웠다. 사령들은 개울을 못 건너 밤을 새우고 정체 모를 정자주인은 태평히 낚시질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 물이 빠지자 건너편에는 또 한패의 사령들이 들이닥쳤다. 완전히 물이 빠지고 나니 어제 도착한 사령들은 그대로 있고, 오늘 도착한 사령들은 개울을 건너기 시작하여 수십 명의 교군들이 가마를 메고 와서 정자주인을 찾았다. 마을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정자에 머물던 사람이 가정선생인 줄 알았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처녀를 공출하여 받아다 노비로, 기녀로, 후실로 만들고 있었다. 가정선생이 원나라 정동행중서성좌우사(征東行中書省左右司)에 벼슬하고 있을 때 황제에게 고하여 동녀를 차출해가는 폐단을 없애도록 상소했다. 황제는 가정선생의 상소를 받아들여 공녀의 징발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원나라 관리들이 가정을 못마땅히 여겨 고려에 압력을 넣어 이곳으로 귀양오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 전 장마에 왔던 사령들은 가정을 억류하여 멀리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하라는 명을 받고 왔던 사령들이요, 물이 빠진 후에 도착한 사령들은 귀양지를 옮기지 말고 석방하여 대궐로 모셔오라고 내려온 사령들이었다.
천지조화로 불길한 사령들이 도착했을 때 물을 건너지 못하게 홍수가 범람하면서도 가정선생이 낚시질하는 쪽만 얕은 물에 여울이 되었으니 개울 반쪽은 물이 깊고 반쪽은 얕다는 말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지금 북내면 가정리에 가정과 반여울이란 지명이 지금까지 전하며, 가정은 그후 입궐하여 정당문학 찬성사가 되고 죽은 후에 문효공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그 아들은 목은 이색 선생으로, 능서면 번도리 매산서원에 문익점 선생과 같이 위패를 모시고 유림회원들로부터 매년 제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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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