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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윤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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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강천면 부평리
□ 시 대 : 조선

한효윤(1536~1580)은 선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근숙(謹叔)이다.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현손이자 문천군수 한여필의 아들이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이 학자로 이름난 구암 한백겸이고, 셋째 아들이 인조의 국구(國舅)인 서평부원군 한준겸이다. 일찍부터 외구(外舅)인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나이 20세 미만에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이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간 후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4년(선조 7)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한원(翰苑)에 천보(薦補)되어 검열(檢閱)과 봉교(奉敎)를 지냈다. 1576년 명(明)에 성절(聖節)의 질정관(質正官)으로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귀국 후에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묘는 부평리 가마섬(부도) 마을의 서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상석(높이 26, 폭 156, 두께 108), 망주석(높이 177, 폭 39, 두께 39), 문인석(높이 167, 폭 56, 두께 38)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근래에 향로석을 추설하였다. 복두공복을 입은 문인석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의습선(衣褶線)이 부드럽게 처리된 특징이 있다. 봉분 앞에 세워진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99)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4행의 큰 글씨로 써 놓았을 뿐 음기나 건립연대는 기록하지 않았다.

묘역 입구에 귀부이수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280)가 건립되어 있다. 귀부(높이 50, 폭 133, 두께 200)의 귀두(龜頭)가 우측으로 돌아가 있고, 이수(높이 58, 폭 112, 두께 53)의 앞면에는 쌍룡쟁주(雙龍爭珠)를, 그리고 뒷면에는 구름 속에 달이 가려져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삼남(三男)인 한준겸의 부탁에 의해서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 유근(柳根, 1549~1627)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영경연(兼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행봉훈랑(行奉訓郞)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한공(韓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라는 긴 제목의 비문을 지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오준(吳竣, 1587~1666)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이양빙체(李陽氷體) 전서(篆書)의 일인자이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올렸다. 백대리석 비신(높이 172, 폭 67, 두께 22)의 앞뒤에 각자했으며 건립연대는 “천계(天啓) 육년(六年, 1626, 인조 4) 십월(十月) 일건(日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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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