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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응이 글씨를 쓴 조상주 신도비
□ 소재지 : 가남읍 금당리 332
□ 시 대 : 조선
조상주(1650~1718)는 숙종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배천이고 자는 익성(翊聖)이다. 강소공 조림의 후손이자 장사랑 조연손의 6세손이고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조술행(趙述行, 1620~1698)의 아들이다. 여주의 조촌(朝村, 지금의 가남읍 금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무과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병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금당리 소댕이마을 서편의 논 가운데에 조상주 신도비(총 높이 약 282)가 입석되어 있다. 방부개석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백대리석 비신(높이 165, 폭 68.5, 두께 35)의 상단에 7대손 조학근(趙鶴根)이 쓴 전액이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행절도사(行節度使) 조공신도비(趙公神道碑)”라 되어 있어 비석의 종류가 신도비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조참판 김양행(金亮行, ?~1779)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1893년(고종 30)에 시작된 신도비의 건립 사업은 조건이 여의치 못해 지지부진하다가 33년이 지난 1926년에 가서야 준공되었다. 당시의 간사(幹事)는 7대손 진사(進士) 조병근(趙炳根)이 담당하고 8대손 조형섭(趙珩燮)과 불초손(不肖孫) 조학근(趙鶴根)이 동참하였다. 글씨는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 이민응(李敏應, 1857~1938)이 해서체로 정성껏 썼다. 비신을 받치는 사다리꼴 모양의 방부(높이 57, 폭 107, 두께 81) 아래에 지대석(높이 25, 폭 124, 두께 98)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주위에는 시멘트블록으로 담장을 둘러놓았다.
신도비의 뒤쪽 구릉에 있던 묘소는 최근에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철갑산 동쪽 구릉에 위치한 배천조씨세장지로 이장하였다. 총 4단으로 구성된 세장지의 두 번째 단에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외관상 쌍분(雙墳)에 망주석과 문인석의 옛 석물이 각 1쌍식 설치되어 있어 일인(一人)의 무덤으로 판단되지만, 실제론 좌측의 봉분에 아버지 조술행이 그리고 우측의 봉분엔 조상주가 매장되어 있다. 이장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고, 세장지가 위치한 구릉의 경사가 심해 묘역을 조성할 공간이 부족하자 이같은 ‘이인일묘(二人一墓)’라는 독특한 장법을 고안해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석물이 본래 설치되었던 원 위치도 조술행인지 조상주인지 현재로선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다. 다만 양식상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한편 조상주 봉분 우측의 묘표는 1998년에 세운 것이다.
이외에도 세장지에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조득인, 종사랑(從仕郞) 조엽(趙曄, 1578~1639),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 조수(趙隨, 1667~1710), 통덕랑(通德郞) 조한우(趙漢遇, 1698~1753) 등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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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