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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이 글을 지은 이인손 묘표
□ 소재지 : 능서면 신지리 236-3
□ 시 대 : 조선
이인손(1395~1463)은 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이다.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손자이자 형조참의를 지낸 이지직(李之直)의 아들이다. 또한 영의정 이극배(李克培, 1422~1495),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1427~1465), 판중추부사 이극증(李克增, 1431~1494), 좌찬성 이극돈(李克墩, 1435~1503),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1437~1504)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고, 이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29년(세종 1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온 후 형조좌랑과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되었고 이듬해 세조의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이후 판중추부사와 우찬성을 거쳐 1459년(세조 5) 우의정에 오른 뒤 곧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묘는 신지리 새미실마을의 북쪽으로 뻗어 내린 북성산의 나지막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초장지는 왕대리이나 영릉이 천장(遷葬)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최근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상석, 고석, 향로석, 장명등의 석물을 신설하였다. 옛 석물로는 복두공복을 착용한 문인석(높이 190, 폭 55, 두께 45) 1쌍만이 남아 있는데, 이끼가 많이 껴 있고 박락이 심한 상태이다. 방부하엽 양식의 묘표(총 높이 169)는 묘역의 우측 아래에 건립되어 있다. 봉분 앞에 있던 것을, 최근에 묘역을 보수하면서 이건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리석(높이 116, 폭 58.5, 두께 15.5) 비신의 앞면에 큰 글씨로 유려하게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증시충희공(贈諡忠僖公) 이공(李公)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 함장지묘(合葬之墓)”라고 써서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있다. 묘표음기는 문인(門人)인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으나 서자(書者)는 기록하지 않았고 마모가 매우 심한 상태이다. 표제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 합장(合葬) 묘표음(墓表陰)”이라 되어있다. 음기의 말미에 “황명(皇明) 성화(成化)…”라는 건립연대가 확인되어 15세기 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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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