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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영정
□ 소재지 : 대신면 계림리 318
□ 지정사항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8호
홍진(洪進, 1541~1616)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認齊)·퇴촌(退村),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검열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홍문록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574년에는 홍문관 박사가 되고 부수찬·정언을 거쳐 1576년에 헌납이 되었는데, 너무 빠르게 승진하여 스스로 사퇴하였다. 1583년(선조 16)에 용담 현령을 지냈고, 1589년(선조 22)에 응교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으로 어가를 호종하고 좌부승지에 오른 뒤 우승지, 좌승지로 선조의 측근에 있었다. 선조가 요동으로 피난하려 하자 이를 막았고, 1593년(선조 26) 환도하기 전에 한성판윤이 된 뒤 염철사를 겸임해 진휼에 힘썼다. 1595년(선조 28)에는 대사헌과 약방제조를 겸임하였고, 이후 이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4년(선조 37)에 판의금부사가 되었고, 임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어 당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09년(광해 1)에 관상감제조가 되었으나 북인들이 득세하자 사퇴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퇴촌유고(退村遺稿)』가 있다.
홍진 상은 이호민 영정이나 이충원 영정처럼 조선중기의 문관 정1품을 상징하는 모란과 구름문 바탕에 쌍공작을 수놓은 목단쌍공작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어, 1604년에 호성공신이 되면서 제작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형식은 이호민 영정을 비롯한 호성공신도들과 같은데, 오사모를 쓰고 운문 단령을 입은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양손은 공수 자세이며, 트인 단령의 끝자락은 삼각형을 이루어 녹색 안감을 보이고 있다. 두발은 팔자로 족좌대에 올려놓았는데, 그 아래는 화려한 문양의 오색채전이 깔려 있다. 표현수법은 매우 정교하여 안면 윤곽선은 황토색으로 묘사한 뒤 오악부분은 피부색보다 조금 진한 색채로 맑게 채색하였으며, 안광이나 얼굴의 주름 및 눈썹, 수염 등의 표현은 매우 정치하여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특히 안면 표현 중 코의 표현이 흥미로운데, 마치 채색이 번져나간 듯 코가 뭉그러져 매우 흉해 보이나, 가전에 의하면 홍진이 원래 술을 좋아해서 코에 주독으로 인한 질병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뭉그러진 코의 표현은 영정을 그린 화원이 사실적 묘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준다. 안면 묘사 외에도 각이 진 모란문 오사모와 운문의 단령은 어두운 색채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문양을 표현하였다. 또한 화려한 흉배는 평면에 자수의 느낌을 살렸고, 채전은 털이 솟은 첨모직임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어 초상화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이다.1)
이러한 전신좌안칠분면교의 자세와 가슴께까지 올라온 서대, 삼각형으로 접힌 단령 끝자락, 바탕인 화려한 채전 등은 이충원 영정·이호민 영정·신경유 영정·장만 영정 등 17세기 전반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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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