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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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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회 의원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사강공파(司江公派)의 후손이다. 1917년 서울에서 신현기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36년 경성 선린상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경성 회현정(會賢丁) 소재의 일본회사인 정자옥(신세계 백화점 전신)에 입사하였다. 1938년 선친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정자옥 주재사원으로 근무하였다. 1940년 다시 경성을 거쳐 여주군 능서면 양거리에 정착하였다가 1942년 여주읍 상리(현재 여주시 상동)로 이주하였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한국민족청년단(한독당 전신)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강천면 도전리에서 벌목사업을 하였고, 여주읍 상리에 정미소도 운영하였다.

해방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사상 대립은 1950년 6·25전쟁으로 본격화되어 여주에서도 공산당이 활개를 치자 단신으로 여주를 떠나 남하하였다. 그러나 여주가 피폭(被爆)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여주로 돌아오던 중, 능서면에 피난 온 가족과 상봉하고 낮에는 산에서 지내고 밤에는 인가에 숨어 지내며 도피 생활을 했다.

1950년 9·28수복(收復)으로 여주군 향토방위대 초대대장에 취임하여 치안유지에 힘썼다. 다음 해 1·4후퇴로 여주군 향토방위대원과 그들의 가족 120명을 인솔하고 경북 김천시로 내려가 피난민촌에 정착하여 반공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환도(還都)와 동시에 동 대원 및 가족을 1명의 피해자도 없이 귀향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유당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투쟁해 수차례의 옥고를 치렀고, 여주읍 의회의 2대 의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경기도의회 2대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평생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는 야인 생활을 하다가 5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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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