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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이다. 서울 출신이지만 주로 단양 매포(梅浦)에서 살았다. 1878년 무과에 급제, 관직에 있던 중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지자 단양으로 퇴거하였는데, 여주에 살다가 늙은 노모를 모시고 단양으로 옮겨 갔다고도 한다.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 제천에서 강학을 하자 그의 문하에 나아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체인(體認)하였으며, 1893년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섬겼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하여 항일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 동문인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가 11월 28일(음) 지평(砥平)에서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거의한 뒤 제천으로 들어가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내었다. 제천에서 이들과 역시 동문인 서상렬(徐相烈)·신지수(申芝秀)·이범직(李範稷)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라, 군사 서상렬, 중군장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 등의 편제를 갖추고 12월 5일 단양으로 진군, 군수 권숙(權潚)을 구금하고, 같은 달 8일 소속의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영월로 퇴각하고 같은 달 15일 이곳에서 유인석이 총대장에 올라 제천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되었다. 이때 그는 진동별모장(鎭東別募將)에 임명되어 유치경(兪致慶)·정화용(鄭華鎔) 등과 함께 서북지방으로 파견되어 강병모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활동이 여의치 못하자,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고자 송상규(宋尙奎)·유치경 등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도 실패하게 되자, 취푸(曲阜)로 가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하고 돌아왔다. 그 뒤 유인석의 명을 받고 성묘(聖廟)를 건립할 장인(匠人)을 구하여 팔왕동(八王洞)으로 돌아오던 중 1900년 3월 흥도진(興道津)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여 죽었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94,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1 ; 양평군, 2000, 『양평의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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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