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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통일전쟁과 여주지역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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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전반 백제와 신라는 대외적으로는 나제동맹을,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를 통해 역량을 결집,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마침 고구려는 대내적으로 정치적 실권이 국왕에서 수상인 대대로에게 넘어가는 혼란을 맞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서북방의 돌궐세력과 일련의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 이 기회를 타서 551년 백제와 신라는 북진을 단행하여, 고구려를 소백산맥 이북으로 구축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계기가 되었다.

551년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공동으로 한강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략하였다. 이로써 백제군은 옛 왕도 한성을 포함하여 한강 유역 하류에 쳐들어가 6개 지역을 회복하고, 거칠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단양신라적성비에서 보듯이2) 소백산맥을 넘어 죽령 이북에서 철령 이남의 10여 군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553년 신라는 백제가 방심한 틈을 타서 백제 점령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점령하여 여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54년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획득함으로써 대(對)중국 외교는 물론 한반도 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6세기 중엽의 이러한 사건은 신라의 한강 유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553년 신라의 신주 설치는 한강 유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획득함과 동시에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열어 장차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7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을 통일한 수·당은 자신들의 통일제국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철 생산지이며 전략적인 요충지인 요동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돌궐-백제-왜를 연결하는 남북 세력권을 형성하여 수·당에 대항하였으며, 신라는 수·당과 연결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동서 세력권간의 항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당의 대규모 침략을 계속 저지함으로써 민족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다. 백제는 무왕·의자왕 대의 세력 만회를 통해 신라를 위협하게 되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당과 연합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동서 세력권 간의 격렬한 대립 끝에 백제와 고구려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력이 쇠잔하고 지배층의 분열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신라를 포함하여 당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하였으나 신라가 이에 반발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당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을 적절히 이용하여 대당 투쟁에 동원하고, 매소성 전투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당군을 축출하게 되었다.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는 민족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나, 영토의 축소와 발해의 건국, 그리고 외세 개입으로 인한 불안전한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한계를 갖게 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660년 대백제 전쟁에서 당군과 연합하기 위해 신라군은 경기 남부지방까지 북상하였다. 660년(신라 무열왕 7) 5월 26일 진흥왕은 김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 병력을 이끌고 금성(경주)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이천)에 행차하였다.3)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수·육군 13만 명을 지휘하게 하고, 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를 응원케 하였다.4) 소정방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덕물도에 다다른 태자 법민에게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고, 무열왕 또한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에 부응하게 하였고, 왕은 금돌성(상주)에 행차하였다.5)

무열왕의 남천정 행차는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 의미와 6정(停)을 거점으로 분산되어 있던 신라의 주력을 한데 모으고,6) 예상되는 고구려의 침입과 백제의 반격에 대비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가진다. 7세기 백제와의 전투에 동원된 병력의 수가 최고 1만 명에 그치는 것을 볼 때7) 신라의 주력 5만 명은 가용한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천정은 황해-경기를 거쳐 남하하는 북방세력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서해를 통한 대중국 외교 루트를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8)

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 고구려 장군 뇌음신은 말갈 장수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쳐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 그런데 결국 이기지 못하고 북한산성으로 옮겨 공격하였으나 그곳의 공략마저 실패하였다.9)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잔여세력의 소탕에 주력하는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북한산성-남천주(정)-술천성으로 이어지는 전선은 북방세력의 침입을 막는 최전선으로, 이후 대당 전쟁에서도 주된 전장으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신라의 통일기인 6세기 중반~7세기 후반 여주지역에서 신라의 진출 사실은 고분과 산성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활발한 유적 조사와 관련 연구의 축적으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으나 여전히 고분과 산성을 축조한 집단의 주체와 성격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여주지역에서 발굴조사를 거친 고분유적으로는 보통리,10) 매룡리,11) 하거리,12) 상리13) 유적이 있다. 그 밖에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은 연라리·금사리·내룡리 고분이 있다.14)

여주지역 최대의 고분유적인 매룡리 고분군(경기도 기념물 제180호)은 경기지역 최대의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그 이후의 이 지역 지배에 대한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까지 조사 보고된 고분은 최대 196기이며, 지금까지 위치가 확인 가능한 것은 139기이다. 이 가운데 37기가 발굴조사되어 이 지역 고분의 성격을 밝혀주고 있다.15) 특히 매룡동 산4-25번지 고분군의 5호 횡구식 석실묘에서는 금동관편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매룡리 고분군의 석실분은 평면형과 널길 위치에서 차이가 있으나, 깬돌을 이용한 축조와 천장 결구방식·단차가 있는 널길·높은 주검받침과 돌베게의 사용 등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경주 충효리 고분 등 주로 신라의 석실분과 유사하다. 한편 작은 항아리와 병, 짧은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류는 신라의 특징적인 인화문(印花文) 토기는 보이지 않으나, 금산 장대리나 대전 주산동 고분군과 같이 6세기 중반 이후의 신라계 고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고구려 석실분의 특징인 말각조정 천장을 한 B-2호분은 5세기대 이후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주 상리유적은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94·199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994년도 조사에서는 7기의 통일신라시대 석실분과 석곽묘가 발굴되었는데, 석실분을 중심으로 주변에 석곽묘가 배치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모두 10기의 소형 석곽묘가 발굴된 1997년 조사를 통해 이들 크기로 보아 작은 석곽묘는 소아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소형 석곽과 주변의 성인용 석곽묘를 통해 이곳 일대가 가족묘를 포함한 공동묘지였음을 확인하였다.

여주지역에서 발굴조사된 횡구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 주체에 대해 종전과는 다른 견해를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여주 하거리 방미기골 고분의 발굴조사를 통해 초기에 축조된 석실분이 백제계 혹은 백제 주민에 의해 5~6세기경에 조영되었다는 견해가 있고,16) 일부 천장이 모줄임[抹角]이 되어 있고 흑색토기가 출토되는 점을 들어 고구려 고분이 일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17)

그러나 일찍부터 여주지역이 6세기 이후 신라의 영토였고, 무덤의 양식 또한 신라의 석실분과 상통함을 들어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축조 주체를 신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18) 또한 이곳 고분을 포함하여 서울 가락동·방이동 고분군 등 한강 중하류 지역의 신라토기가 출토되는 고분군들을 신라 후기의 지방 고분군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19)

여주지역의 석실분을 중심으로 한 고분문화는 매장방식이나 장신구, 토기 등에서 신라고분의 특징들이 전반적으로 확인된다. 다만 고분군의 입지와 토기문화에서 백제의 영향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이는 여주지역이 백제, 고구려, 신라로 이어지는 지배영역의 변화에 따른 문화 복합적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여주지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고분군의 존재로 미루어보아 6세기 중엽부터임을 알 수 있다. 여주지역은 당시 전략적 요충인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남북 교통로의 요지이며, 이후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10정의 하나인 골내근정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6세기 후반, 여주지역에 신라의 문물이 직접적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 신라 문물의 유입, 특히 고분문화는 단순한 전파가 아니라 신라인의 이주와 같은 직접적인 이식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백제나 고구려와 다른 신라의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방식을 뜻한다. 백제의 경우, 정치·문화적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지역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치를 허용하는 간접 지배를 실시하였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 정복지역을 곧바로 신라의 지방지배로 편입시켜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직접 지배방식을 택했다. 즉 신라는 진흥왕 때에 왕권 중심의 율령체제의 강화와 함께 새로운 복속민조차도 전부 왕민(王民)으로 인식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신라 중기 정복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방식을 볼 때 진흥왕 대 신라에 정복된 여주지역이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여주지역의 수장층은 신라의 신분제도에 편입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매룡리 5호 횡구식 석실묘에서 발굴된 금동관편은 여주 매룡동 일대를 통할하고 있다가 신라에 의해 흡수된 재지 수장층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영토와 인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는 필연적으로 신라 문물의 전파를 수반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여러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여주 파사성은 몇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남한강 중류에 위치하여 교통로의 요지라는 지리적 특성과 멀리까지 주변 일대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 등으로 일찍부터 주목된 산성이다. 산성은 신라 파사왕 2년 어떤 여장군이 쌓았다는 전설과 나당전쟁 때 당군과 신라군이 크게 전투를 벌인 매소성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20)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승려 의암(義巖) 도총섭(都摠攝)이 수축했다고 한다.21)

내외협축으로 쌓아 올린 성벽의 둘레는 935.5m, 최고 높이 6.5m이다. 성벽은 부정형 할석의 한쪽 면을 맞추어 쌓아올린 후 빈 틈에 쐐기를 박은 서벽과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품(品)’자형으로 쌓은 북벽 구간으로 대별된다. 일부는 두 가지 축성 방식을 혼용한 경우도 있다. 다듬은 돌을 쌓은 곳이 초축(初築) 구간이고, 부정형의 석재를 사용한 구간이 후대에 수축한 곳이다. 성벽 대부분에는 여러 번의 수축을 거친 기단보축이 남아 있다.

산성 내에서 백제 주거지가 발견되었지만, 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도 신라 토기류이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가 쌓은 성일 가능성이 높다. 출토된 토기의 대부분은 단각고배류와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 주름무늬병 등이 주종을 이룬다.

특히 성곽의 초축 시기를 가늠하는 단각고배류는 6세기 중반경의 전형적인 단각고배와는 달리 대각에 투창이 없이 끝이 말려 있는 점, 연질이 다수를 이루는 점 등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며, 인근의 매룡리 고분군의 출토품과 유사하다. 출토된 단각고배는 6세기 중반~7세기 초로 편년되어 산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다. 다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문화의 직접적인 이식과 함께 토착적인 요소가 함께 나타나 신라의 지방지배 방식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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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