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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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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반남, 호는 평재(平齋)이며, 참정 박홍수(朴洪壽)의 아들이다.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주차천진종사관·부교리·장령·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886년 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로 청(淸)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후 이조참의·대사성·호조참의·형조참판·예조참판·인천부사·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1893년 호조참판 재직시에 동학도들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보은집회를 개최하자 청군(淸軍)의 파병 문제를 원세개와 협의하였다. 이해 9월 여주목사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5월 장흥부사로 전임된 뒤 전라·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충청도관찰사 재직시에는 일본군 및 경군(京軍)과 연합하여 공주에서의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중추원의관·외부대신·육군참장·의정부찬정 등을 지내며 간도행정관리권 교섭과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는 한편, 1899년 조청통상조약, 1901년 조비(朝比)수호통상조약, 1902년 조백(朝白)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1902년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1904년 귀국하였다. 1905년에는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규탄 받았다. 그후 의정대신이 되어 1907년 이른바 ‘이완용내각(李完用內閣)’이 성립될 때까지 내각을 이끌었다. 이완용내각 하에서도 내부대신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이완용이 저격당한 뒤에는 일시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지냈다. 1910년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서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였으며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爵位)와 은사금을 받고 중추원고문을 지냈다. 관직 외에 1908년경에는 윤덕영(尹德榮)·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교육 진흥과 위생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進坊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 참고문헌 : 『고종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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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