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평신도의 성사 집전이 교리에 위배되는지를 묻기 위해 북경 교회에 파견된 윤유일은 1789년 10월, 하층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북경으로 가서 남당(南堂)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Gouvea, 湯) 주교를 만났다. 그리고 1789년 12월 22일에는 북당에서 라자로회로(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로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 신자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대부는 예수회원이며 궁정화가인 판지(Panzi, 潘) 수사였는데, 그는 윤유일의 모습을 그려 로마로 보냈다. 1790년 5월 북경에서 돌아온 지 2개월 후에 다시 ‘선교사 영입’이라는 임무를 띠고 북경에 가서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와 밀사가 만날 시기, 방법과 장소 등을 약속하고 돌아왔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윤지충이 신위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 비롯된 진산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2년여가 지나서 다시 신부를 들여올 계획을 세운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윤유일로 하여금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를 적신 손수건을 들고 중국에 가서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것이다.